프롤로그

2010년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 남자가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는 일반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는 이때까지의 수상자들 같이 유명하거나 일반인도 알만 한 사람이 아닌, 그냥 웬 영감님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그에게 제대로 된 소감을 말할 시간도 주지 않은 아카데미의 병크도 한몫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영감님 취급하기에는 단순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직 흑백영화가 꽤 큰 자리를 차지하던 50년대 중반에 데뷔, 이후 큰 영화들과는 거리가 먼 작은 예산의 영화 2편을 제작하고 그 영화들에서 이득을 얻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거기서 자신이 감독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깨닫고 3번째로 제작하는 영화에서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이후 그는 다양한 장르의 작은 영화들을 감독 및 제작하면서 그의 명성과 부를 쌓아갑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저런 작은 분쟁들로 피곤해진 그는 감독 일에 휴식을 선언하고 뉴월드픽쳐스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립니다. 적은 예산으로 만드는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일에 전문인 그 곳은 수많은, 그러나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에게 영화판에서 일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곳에서 일하다 나간 많은 이들은 이후 할리우드의 큰 기둥이 되는 역할을 합니다. 나가지 못하고 그곳에 자리를 잡은 이들도 그와 일하는 부분에서 큰 기둥이 됩니다.

83년에 그는 뉴월드픽쳐스를 팔고 제작에만 열중하려고 했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게 돌아갔고, 결국 그는 다시 배급의 세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콘코드, 뉴 콘코드, 뉴 호라이즌 등의 자신의 작은 배급 및 제작사를 통해 많은 작품을 제작하게 되고, 95년에는 케이블TV채널인 쇼타임과 손잡고 일련의 여러 영화들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쉬지 않고 1년에 한편 이상은 영화나 TV시리즈물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배급도 포기한 건 아니어서 그가 제작하지 않은 영화들이 그의 회사를 통해 배급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또한 그는 배급 일을 하면서 돈이 되는 부분에 있어서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그 다양한 시도는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맛보게 해주었습니다. 어렵다고 생각한 프랑스나 스웨덴의 영화들을 쉽게 보게 해주었고, 다양한 성격의 영화들을 미국에 소개하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가 중시한 것은 수익이었기 때문에 차마 영화에 하지 못할 짓을 감행했습니다. 어떤 영화는 절반분량이 잘리고, 추가된 말도 안 되는 부분이 붙어서 팔리기도 했고, 어떤 영화는 진지한 무협물이 액션이 강조되고 대사가 변화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어떤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 90분짜리 영화에서 15분이 잘리는 일이 일어났고, 일부는 그 저열한 완성도에 치를 떨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는 우리가 잘 아는 영화들에서 내용과 전개를 따와서 써먹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몇몇 영화들은 디씨인사이드에서 말하는 필수요소 수준까지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것들을 봐도 그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앞에 얘기했다시피 그가 길러낸 사람들의 상당수는 90년대의 할리우드 그 자체였고, 그가 시도한 여러 장르의 영화들은 지금 봐도 생각보다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배급한 영화들 덕택에 그 당시의 미국인들은 말 그대로 다양한 영화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런 부분을 포기했으나, 그가 제작한 영화들은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건 아직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그는 아직 영화를 만드는 중이고, 대부분은 그냥 한 순간을 소모하기 위한 영화들이지만, 아직 가끔씩 정말 잘 나온, 저예산이기에 가능한 것들이 나오기도 했고, 아직 가끔씩 좋은 인력을 뽑아서 훈련시켜내기도 합니다. 이제는 아주 가끔 나오는 것이지만, 때로는 꽤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저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완전한 이야기는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빈 곳들을 채우면서 이 이야기를 전개할 생각입니다. 재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할 뿐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가 누군지 얘기를 안 했네요. 그의 이름은 로저 코먼입니다. 
P.S. 이 글은 현재 군생활 중인 홍준호 군( http://blog.naver.com/sega32x )에게 헌사합니다.

by 천용희 | 2010/11/22 02:55 | 로저 코먼 연대기 | 트랙백(1)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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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잠보니스틱스 at 2011/02/27 22:47

제목 : 나는 어떻게 헐리우드에서 백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
원제: How I made a hundred movies and never lost a dime 저자: 로저 코먼 출판사: 열린책들 로저 코먼은 일반적으로 B급영화의 제왕이라 불리지만 사실 그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며 코먼 본인도 그 호칭을 그다지 달갑게 생각지 않는 것 같다. 'B급 영화'라는 것은 오늘날 알려진 의미와는 달리 시대적인 배경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1930년대에 메이저 제작사가 큰돈을 들여 ......more

Commented by 택씨 at 2010/11/22 16:37
이런 분이 계셨군요.
Commented by 천용희 at 2010/11/22 17:55
이런 분에 대한 글을 쓰려고 자료 모으느라 은둔 모드였네요.

그간 별일 없으셨죠?
Commented by okto at 2010/11/26 21:04
아... 전설의 그분이로군요. 기대 만빵입니다ㅎㅎ
Commented by 천용희 at 2010/11/27 08:24
그래도 다른 전설보다는 훨씬 의미가 있는 분이죠.

특히 특정시기에서는 ㅎㄷㄷ하셨습니다.
Commented at 2010/12/17 14:3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천용희 at 2010/12/17 19:56
댓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자료를 모으면서 보는데 모감독님과 이 양반을 비교하는 건 조금 걸리는게 그 모감독님은 어느일정시기를 지나면 그냥 망한 감독님이 되시는데, 이분은 뭐랄까 미묘하게 꾸준하게 버텨내는 것도 대단하다 보거든요.

저도 그 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책의 진짜 가치는 회상하면서 말하는 인기인들이라 봅니다.

아마 어느 일정시기 까지는 그 책에 조금 기댈거 같네요.
Commented at 2010/12/25 01:1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천용희 at 2010/12/25 18:01
답변 남겨드렸습니다.
Commented by 인디고 at 2011/06/08 17:38
로저 코먼은 지난 달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렸던 B영화 감독에 대한 특별전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소위 B급 혹은 B 영화라고 하는 영화의 전형이었던 것 같아요.
포스트 읽고 많이 배울게요.
Commented by 천용희 at 2011/06/11 02:30
읽을게 별로 없을 거라는게 저의 중론이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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